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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산책] 주관성과 보편성, 그 사이의 문화풍경

기사승인 [209호] 201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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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 미학을 다시 돌아보다

   
  △ 사진출처 : pixabay  

   아름다움은 주관적인가 아니면 객관적인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미는 주관적이다. 그러기에 “내가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는데 누가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그저 자기가 좋아하고 즐기면 그뿐이지 무슨 말이 필요한가” 등과 같은 다소 냉소적인 말에 대해 반박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과연 미가 주관적이기만 할까? 그렇다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다. 당신은 아름다움을 욕망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아름다움을 모른다면, 어떻게 아름다움을 욕망할 수 있겠는가? 플라톤은 현상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하는 본질적인 아름다움, 곧 미의 이데아를 강조한다. 우리는 이러한 미의 이데아, 달리 말해 미의 보편성을 갖고 있는 것인가? 이런 물음과 연관해서 생각하면, 아름다움이 철저하게 주관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터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미는 주관적이지만, 그럼에도 그 주관성에서 보편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18세기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이러한 미의 주관성과 보편성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칸트 철학의 핵심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이 물음은 구체적으로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는지(『순수이성비판』의 물음), 인간이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지(『실천이성비판』의 물음) 그리고 인간이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지(『판단력 비판』의 물음) 등으로 세분화된다. 칸트 비판철학의 기획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서 출발한다. 인간 이성의 이해에서 앎(인식)과 행위(윤리)만이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느낌, 곧 감정을 지닌 존재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식적 존재이자 윤리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느끼는 존재이다. 칸트는 앎(인식)과 행위(윤리)의 영역을 매개하는 느낌(감정)의 영역으로까지 나아가 비판철학의 과제를 수행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판단력비판』에서 느낌(감정)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데, 여기서 미적 판단의 계기들, 곧 “무관심성”, “무개념성”, “목적없는 합목적성”, “주관적 필연성” 등을 주로 논의한다. 미적 판단은 무관심적이다. 단순한 감각인 “쾌적한 것”과 “선한 것(도덕)”에 관련된 만족은 ‘관심’에 결부되어 있는 반면, 미적 판단은 이러한 모든 관심에서 벗어난 상태의 만족에서 이루어지는 관조적 판단이다. 미적 판단은 무관심적일뿐만 아니라 “개념 없이” 보편적으로 만족을 주는 판단이다. “개념 없이”란 개념을 배제한다는 것이 아니라 미적 판단이 전적으로 개념에 의해 이루어지는 판단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예술의 예를 들어보자. 널리 알려졌듯이 마르셀 뒤샹은 1917년에 공장에서 생산된 변기를 그대로 출품하고,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남성의 오줌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기’라는 식의 규정적인 개념에만 머물 경우 이 변기는 그저 변기일 뿐이다. 그렇지만 직관, 개념 그리고 상상력 사이에서 자유로운 관계가 이루어지면, 개념적으로 규정된 변기가 아니라 미적 판단의 대상으로서의 변기, 곧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 “목적없는 합목적성”이란 목적을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목적을 가정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들판에 피어 있는 어떤 꽃이나 미술관에 걸려 있는 어떤 예술작품의 경우, 우리는 그 목적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목적을 가정할 수는 있다. 물론 “마치 -인 것처럼” 가정된 목적이기에 형식적이고 일종의 놀이와도 같은 것이다. 또한 네 번째 계기로 미적 판단의 주관적 필연성이 다시 강조된다.

   칸트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 미적 판단이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한 것임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 곧 “미적 판단의 주관적 보편타당성”은 논리적으로 보자면 둥근 사각형과 같은 형용모순이다. 칸트는 미의 주관성과 보편성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반성적 판단력”을 도입한다. 칸트에 따르면, 판단력은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으로 구분된다. 규정적 판단력이 특수한 것[개별자]을 보편적인 것[예컨대, 원칙이나 법칙]에 아래에 무조건 편입시키는 것인 반면, 반성적 판단력은 특수한 것[개별자]에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미적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반성적 판단력이다. 반성적 판단력에 따른 미의 보편성은 규정되거나 미리 확정된 것이 아니라 개별자들이 함께 찾아가고, 만들어가고 열어가는 그러한 의미의 보편성이다. 포스트모던 철학자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55)는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을 티푸스 질병에 대한 의사의 진단을 예로 들면서 설명한다. 규정적 판단력에 따른 의사는 규정적 개념인 티푸스를 알 수 있지만 환자의 특수한 상태를 개별적으로 진단하지 못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반성적 판단력에 따른 의사는 환자의 특수한 개별적 상태를 충분히 살펴본 이후에 가장 적절한 진단과 처방을 내릴 것이다. 당신은 어떤 의사를 찾아가겠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자명해 보인다. 이런 점에서 미학의 원리인 반성적 판단력은 놀라운 마음의 능력이다. 우리네 문화풍경에서 심각하게 결여된 것은 반성적 판단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간단히 과정이 무시되고 결과만 중시되는 지금 여기의 문화에서 다시금 반성적 판단력이 절실히 요청된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문제점들을 반성적 판단력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어쩌면 또 다른 희망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성적 판단력은 주관성 속에서 보편성을 발견하는 판단력이다. 칸트는 이를 공통감에서 다시 설명한다. 공통감은 미적 판단이 단순히 이기적이고 감각적 취향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될 수 있는 복수적인 판단이란 점을 드러내는 미학적 지표이다. 칸트는 공통감을 “쭈잠멘슈팀뭉(Zusammenstimmung)”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함께’를 뜻하는 ‘쭈잠멘’과 ‘소리’를 뜻하는 ‘슈팀뭉’이 합쳐진 말이다. 그러니까 미와 예술의 주관적 보편타당성은 개념적으로 규정된 객관적 소리가 아니라 주관성과 보편성이 긴장 관계를 이루면서 “함께 소리를 내는 것”이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공통감을 정치적인 것과 연관해서 심층적으로 논의한다. 아렌트는 칸트 미학에 이미 정치적인 것의 많은 요소가 함축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미적 판단과 정치적 판단은 개인의 주관성과 공통의 보편성, 어느 하나에 치우친 판단일 수는 없다. 달리 말해 미학과 정치는 특수와 보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장에서 형성된다. 칸트 미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미적 공통감을 통한 “확장된 사유방식”이다. 인간의 이성은 단순히 논리적이거나 윤리적인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수 없고, 감정의 차원을 포괄하는 더 넓은 사유의 지평에서 논의되어야만 한다. 정치문화에서 작동해야 할 인간의 이성 또한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모더니티, 포스트모더니티를 거쳐 오늘날의 문화담론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촉발된 주관성과 보편성 사이의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난제, 곧 아포리아(aporia)이다. 칸트 미학이 다루고 있는 이러한 아포리아는 과거의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성을 갖는다. 여기에 일일이 적시할 수는 없지만,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 시기에 등장했던 수많은 구호를 떠올려 보자. 실상 그 어떤 구호도 결정적인 것일 수는 없고, 결국에는 주관성과 보편성, 그 ‘사이(between)’에서 파악되고 이해되어야 할 터이다. 이러한 ‘사이’는 삶의 활동으로서의 놀이와도 같다. 놀이는 지속적으로 자유와 규칙 사이에서 존재한다. 문화는 이 세상, 그 모든 놀이의 총화이다. 그런데 우리네 문화풍경에 이러한 놀이터가 있는가? 능률화와 표준화에 따른 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강박관념이 우리를 엄습하고 있지 않은가? 혹은 현실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좌절하거나 실망해서 그저 자신의 사적이고 이기적인 감각의 주관성으로 달아나고 있지는 않은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적어도 아름다움의 주관성과 보편성, 그 ‘사이’에 대한 ‘반성적’ 사유는 이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지평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것이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문화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임성훈 성신여대 교양학부, 미학

<저작권자 © 동국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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