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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산책] 자낳괴, 디지털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기사승인 [217호] 202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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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 Pixabay

   성적인 신체 기관을 강조하는 춤을 지칠 때까지 춘다. 공공장소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된 것처럼 소란을 피운다. 반려동물을 때린다. 고통을 유발할 만큼 매운 음식을 대량적으로 먹어치운다. 이러한 과정을 미디어에 중계하고 수익을 창출한다.

   ‘자낳괴’는 이러한 사례를 지시하는 신조어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의 약자로서, 돈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는 일부 ‘크리에이터’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러나 현재는 수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비정상적인 행동이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수행하는 인간을 가리키는 데 포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용어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상호연관적이면서 또한 모순적인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자낳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는 일의 치열함을 상기시킨다. 위에 열거한 크리에이터들이 자신의 퍼포먼스를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수익을 위해서 고통을 견디어 낼 때, 사람들은 그에게 공감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낳괴’를 조롱과 혐오의 표현으로 사용하면서, 동시에 연민의 태도를 보인다. 이를테면 어떤 청년 블로거는 취업을 위해 하기 싫은 ‘스펙’을 쌓는 일을 하며 자신을 ‘자낳괴’에 비유했다. 이때 ‘자낳괴’는 우리 모두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마련해야 하는 가면이다.

   둘째, ‘자낳괴’는 자본주의 사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주체를 지시한다. 요컨대 자낳괴는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지, 자본주의의 노예가 아니다. 자낳괴가 벌이는 일들은 누군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축적하고자 하는 자유로운 의지의 결과다. 그가 수치심을 견디며 신체를 노출하는 것, 고통을 견디면서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 사람들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소란을 피우거나 반려동물을 괴롭히는 것 등은 모두 자율적인 선택이다.

   그러니까 ‘자낳괴’는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혐오스런 존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차마 할 수 없는 사업을 벌이는 (반)영웅이다. 자낳괴는 현대사회가 우리에게 치열한 생존경쟁을 강요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러한 경쟁에 자율적으로 참가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한편 자낳괴는 단순히 자본주의 괴물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과 결합한 자본주의의 괴물이다. 그리하여 디지털 기술로 인해 확장된 인간 능력과 존재를 예시하며, 그러한 혼종적인 신체가 어떻게 현단계 자본주의에 의해 문제화되는지 보여준다.

   1인 미디어의 크리에이터들은 ‘인간의 확장’을 대표하는 주체들이다. 마샬 맥루한의 고전적인 견해에 따르면 테크놀로지와 미디어는 인간의 신체기관 및 그것이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안경이나 현미경, X-Ray 등은 인간의 눈을 확장하여 보는 능력을 향상시켰고, 자전거나 자동차 및 비행기는 인간의 다리를 확장하여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크리에이터는 카메라, 마이크, 인터넷 네트워크, PC, 스마트폰 등의 기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바로 그러한 기계를 통해 세계로 확장하는 존재다.

   한편 기술 미디어는 개인이 창조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일반적 대중매체에서는 소수의 발신자가 다수의 수신자에게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불특정다수에게 표현하고, 부를 창출하는 것은 소수의 특권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문화의 생산자의 위치에 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러한 양상을 가리키는 ‘프로슈머’나 ‘웹 2.0’ 같은 용어는 이미 낡은 어휘가 되어버렸다. 현재 유튜버나 아프리카 BJ와 같은 크리에이터들은, 원칙적으로 개방된 네트워크에 자기의 콘텐츠를 공개한다. 우리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창조적 자기표현의 가능성이 열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인터넷 기술을 통한 ‘인간의 확장’은 심지어 ‘인간의 계발’까지도 수행하는 것 같다.

   그런데 ‘자낳괴’가 출현하는 것은, 바로 이 인간 능력이 급격히 확장되는 현장 속이다. 그것은 ‘자낳괴’를 낳은 자본주의가 기술에 의한 인간의 확장, 나아가 미디어 환경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계발’과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다만 상품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주체성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현재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개성이나 진정성과 같은 인간적 자질들이다. 이를테면 성공한 크리에이터들의 실용적인 조언이 담긴 서적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콘텐츠로 삼으라거나, 자기 채널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라는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때 개성이나 진정성은 경제적 가치의 생산 내부로 통합되어, 노동자의 역량이자 자본이 된다.

   ‘자낳괴’의 특징들 역시 경제적 생산 내부로 통합된 인간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낳괴’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동원하는 것은 특수한 정신적 능력들이다. 그것은 수치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거나, 심지어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능력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너의 개성을 표현하라’는 명령에 응답한다. 즉 부정적인 자질 역시 그의 개성으로서 상품화된다. 또한 돈을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역설적으로 일종의 진정성이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자낳괴’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자낳괴’는 천박한 배금주의자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자본주의가 생산하려고 하는 주체의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다.

   그렇다면 ‘자낳괴’는 그것을 낳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자낳괴’는 ‘인간의 확장’ 및 ‘인간의 계발’이라고 하는 계몽적 기획의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서 출현했다. 이는 ‘자낳괴’가 단순히 몇몇 크리에이터들의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생산될 수 밖에 없는 주체라는 점을 의미한다.

   현재 크리에이터들은 미셸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신자유주의 노동자를 빗댄 ‘자기 자신의 기업’이라는 비유에 적절히 들어맞는 존재다. 푸코에 따르면 현대 노동자의 신체는 하나의 ‘능력자본’이며 ‘인적자본’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자본 삼아 경쟁해야 한다. 그리고 마우리치오 라자라또가 『부채인간』에서 지적했듯이, 자기 사업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면 크리에이터들은 기업가적 존재인데, 우선 그들이 실제 자기고용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기 자신을 자본으로 삼는다. 자신의 개성을 콘텐츠로 삼고, 나아가 상품화하는 것이다. 한편 이들의 ‘기업가’로서의 정체성은 그들이 경쟁하는 플랫폼 속에서 강화된다. 2021년 기준으로 한국에서 골드버튼(구독자 100만명 이상)을 획득한 사람은 약 400명이다. 실버버튼(구독자 10만~99만)을 획득한 사람은 약 5,000명에 달한다. 이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은 실로 과도하여,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과로에 시달리거나 번아웃을 호소하는 일이 잦다. 이는 크리에이터들이 자신을 상품화하며 가혹하게 경쟁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의 최첨단에서 있다는 뜻이다.

   ‘자낳괴’는 이러한 ‘자기 자신의 기업’들이 벌이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출현했다. 다만 그들은 자신을 일종의 외설적인 상품으로서, 일종의 틈새시장에 유통시켰다. ‘자낳괴’는 실제 수익과 무관하게, 크리에이터 세계의 무산자다. 그들의 상품은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사전적 의미에서 대중성을 가지기 어렵다. 또한 그들은 가진바 자본이 적다. 그들은 문화자본, 사회적 자본, 혹은 유전 자본을 갖춘 경쟁자와 적절히 싸우지 못한다. 하지만 ‘자낳괴’들은 일반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할 자질들을 자본화하여 경쟁에 나선다. 그것은 성공을 위한 결단인 동시에,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물론 ‘자낳괴’는 현재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상징적 거점이 될 수 없다. 자기를 생산한 ‘디지털 기술/자본주의’ 복합체에 일체의 비판의식 없이 참여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며 도나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선언』에서 사용한 사이보그의 은유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자낳괴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구축된 주체로서, 유기체와 기계의 혼종이라는 사이보그의 개념에 부합한다. 그러나 도나 해러웨이가 기대했던 것, 즉 세상을 바꾸는 전복적인 힘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자낳괴’는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가 내파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 사회현실의 가장 외설적인 부분이 다만 일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본주의가 직접 낳은 괴물이라는 점을 은유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자낳괴’는 자본주의의 괴물성을 보여주는 상징이 된다.

유인혁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저작권자 © 동국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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