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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비평] ‘이 영화는 실화를 모티프로 하되 이야기를 재구성하였습니다’ : 재현의 윤리 다시 묻기

기사승인 [218호] 202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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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모른다>를 중심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2004)는 다음의 안내문으로 시작한다.

   この映画は、東京で実際に起きた事件をモチーフにしています。しかし、物語の細部や登場人物の心理描写はすべてフィクションです。

   (이 영화는, 동경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모티프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세부사항이나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전부 픽션입니다.)

   영화에서 실화를 기반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그렇게 이례적은 일은 아니나 이 영화의 안내문이 유독 별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안내문이 강조하는 내용이 ‘실화’가 아니라 ‘픽션’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화에서 아이디어를 얻되 영화에서 재현되는 인물과 장면이 전부 새로이 구성되었다는 말은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해당 사건 자체의 규명 즉 재연(再演)을 최우선으로 목표하지 않으며, 사건에 대한 사실 보도를 따르되 실제로 사건의 당사자를 하나의 캐릭터로 상정하고 인물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고 입체화할 것인가에 방점을 찍겠다는 것으로 말이다.

   영화의 안내문에 대해 길게 언급한 이유는 미디어 서사와 재현(再現)의 문제를 논하기 위함이다. 재현은 서사화의 일환으로 한 사건을 어떤 이야기로 만들 것이며 그 과정에서 사건의 주요 참고인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왜 그렇게 할 것인가를 해석하고 설득하는 과정이다. 즉 하나의 사회적 사건(‘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이야기하기의 방식으로 논증하는 일이다. 때문에 재현은 미처 보지 못한 사건의 진실을 드러낼 수도, 반대로 그것을 은폐하거나 왜곡할 수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모티프로 삼았다고 밝히는 동경의 사건은 1988년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이다. 한 여성이 아버지가 다른 아이 다섯을 낳았고 모두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셋째는 병사한 채 집에 방치되었고 이 아이들을 두고 보호자 여성은 길게는 한 달 이상 집을 비우고 가끔 집에 송금했다고 알려졌다. 두 살이었던 막내는 첫째의 친구들이 가해하여 사망했고, 남은 아이들은 영양실조 상태로 발견됐다고 한다.

   영화는 이 사건을 재연이 아닌 재현했다고 밝힌 만큼 이 사건을 좀 다른 관점에서 구현하고자 한다. 영화에서 아이들이 보호자에 의해 방치된 정황이 있지만 엄마 ‘유’와 네 명의 아이는 애착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때 유는 아이들에게 애정을 가지면서도 아이의 각기 다른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며 음반을 내려고 했다가 망해버린 자신의 삶을 푸념하는 다면적 인물로 그려진다.

   이렇듯 엄마 역의 유는 희생하는 어머니나, 자기의 망가진 삶을 아이를 탓하는 전형적 악역 중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그려진다.

   이러한 재현은 아동 방치 범죄를 희미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우려를 잊지 않으면서도 다음과 같은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돌봄과 관련된 현실의 사건에 연루된 여성은 범죄자이면서 ‘여성’인 것에 대해 이중 처벌을 받는 경향이 있다. 즉 가부장제 하에서 아이를 돌보지 못한(않는) 여성은 인간 실격이며 여지 없이 악한 인물로 표상된다.

   만약 이 영화가 재현의 과정에서 실제 사건의 방치자를 ‘엄마’가 아니라 ‘유’로 해석하려 했다면, 이 사건은 무책임한 엄마에 의한 아동 방치가 아니라 여성을 성착취함으로써 아이를 방치한 각기 다른 다섯 명의 남성과 그들이 일련의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방기할 수 있도록 허용한 젠더 역할에 대한 사회의 비판 없는 성 고정관념에 의한 것이라는 다른 관점의 제시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웃 그 누구도 방치된 아동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에 대한 비판적 해석이기도 하다.

   서사가 사건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통해 재구성된 이야기라는 점에서 시나리오의 역할을 동시적으로 한다고 볼 때, 하나의 재현된 서사는 그저 ‘이렇게 볼 수도 있다’는 것 이상의 가능성을 지닌다. 이는 특정 사건에 연루된 사회 구성원의 정체성을 얼마나 다면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으며,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미래적 전망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와 관련돼있다. 〈아무도 모른다〉를 보면서 쉬이 유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돌봄 소재의 사회적 방치를 줄곧 여성의 범죄화 해오지는 않았는지 재고해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선우은실 문학비평가

<저작권자 © 동국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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