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세상의 빛이자 중심이요, 내 삶을 고동치게 하는 심장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1990년대에는 그랬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한 예술영화전용관에서 단관 개봉해 10만 관객을 동원하고, 지금의 시각으론 예술영화에 가까운 왕가위의 <중경삼림>이 당시 대학생들의 필견 영화였던 시절. PC통신이 유행하고, 인터넷이 이제 막 깔리기 시작하던 그 때는 『씨네21』이나 『키노』 같은 영화잡지를 읽어야 영화 좀 본다는 소리를 듣던 때였다. <응답하라 1994>였던가? 극 중 대학생 성나정(고아라)이 영화 동아리방에서 선배들과 『키노』가 새로 창간됐고 창간호 부록으로 <저수지의 개들> 포스터를 줬다는 애기를 나눌 땐, 피식 웃으며 ‘이것들아 내가 그 『키노』의 마지막 기자란다. 내가 신입기자로 들어간 지 3개월 만에 폐간됐어’라며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나는 그 시절 영화에 미쳤고, 영화에 순정한 맹세를 바쳤다.
대략 25년이 지난 지금 나는 한국연구재단의 5년짜리 개인연구사업을 수행하고 있고 대학원과 학부에서 영화를 강의하고 있다. 영화연구에 입문한지 석사과정부터 치면 22년, 대학 강단에 선 지 16년을 거치며 나는 연구와 강의는 영화에 대한 사랑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곤 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직업으로 택하거나 거기에 학문적인 메스를 들이댈 때, 그 사랑이 반감될 것이라는 진부한 헛소리가 아니다(팬덤 연구의 대가 헨리 젠킨스는 스스로 무엇에 대한 팬이어야 그 세계를 더 깊고 넓게 본다고 말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국영화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는 할리우드 고전이나 유럽 예술영화에 대해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 들뢰즈의 『시네마』를 한 자도 읽지 않아도 그의 연구에는 지장이 없다. 나름 씨네필이라고 자부했고, ‘씨네필의 경전’으로(잘못 추앙된) 잡지에 잠깐 동안이나마 있었던 나도 국제영화제 수상작이나 ‘미래의 시네아스트’로 불리는 신인감독의 영화들을 챙겨보지 않은지 오래다. 내가 써야 할 논문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때로 전문성이란 이상한 방식으로 우리를 최악의 외골수로 만든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영화에 대한 나의 사고는 바뀌지 않았는데 영화는 너무 많이 바뀌었다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 사실, 영화가 바뀐 것은 없다. 여전히 극장에서 이야기가 있는 영화를 보고 스펙터클에 매혹당한다. 바뀐 것은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다. 오늘날 영화는 극장만이 아닌 도처에 있다. 예전에 비디오나 DVD 등은 극장에서 놓친 영화나 구하기 힘든 영화, 다시 보고 싶은 영화를 보는 통로였다. 그것은 아무리 잘 줘도 대체재, 혹은 보조수단이었을 뿐이다. VOD와 다운로드는 영화를 TV예능처럼 소비하거나 반대로 모아놓는 것으로 바꿔 놓았다. 잠시 보다 재미없으면 꺼버리는 소모품 혹은 갖고 있으면 본 것 같은 희한한 충만감. 요즘 젊은이들은 보지 않은 영화를 유튜브 요약본으로 보고 영화를 봤다고 한단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과거 내가 사랑한 시네마가 모욕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꼰대의 푸념이라는 것도 안다. ‘시네마가 뭔데? 그들에겐 SNS, 게임, 웹툰, 웹소설, OTT와 똑같은 n분의 1이 아닌가?’
강의를 처음 시작했던 16년 전에 왕가위는 그때의 학생들에게도 인기 감독이었다.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수업 시간에 왕가위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게 누군데요’ 하는 표정으로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던 영화전공 학생들을 보고 당황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탓할 일도 아니다. 그들에겐 자라면서 본 영화가 세상 영화의 전부다. 그러다가 최근 2년 간 코로나 여파 속 재개봉 붐을 타고 상영한 <중경삼림>과 <화양연화>를 보고 왕가위를 ‘발견(!)’했다고 기말 과제에 써 놓은 학부생의 글이 너무 귀여워 만점을 날려줬다. <패왕별희> 속 장국영의 저 처연한 아름다움에 반했다는 학생에겐 그가 보지 못할 흐뭇한 미소도 지어줬다. ‘모욕당한 시네마’에 대한 나의 소심한 복수다. 그렇게 나의 그 시절 20대와 이 친구들의 지금 20대는 왕가위와 장국영을 통해 마주한다. 그렇게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간다.
정영권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강사, 부산대 영화연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