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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얽힘, 창발, 영감 그리고 융합

기사승인 [221호] 2022.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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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출처 : Pixa bay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학과 특성상 인문, 공학, 예술 등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이들이 한 공간에 모였다. 예술 전문 학교를 졸업한 나로서는 쉽게 접할 일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소속 연구실에서는 그런 이들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만들며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상호작용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평소 대화하기 어려운 다양한 주제에 대해 대화함은 물론, 다각도로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으로부터 무수한 인사이트가 발생했다. 공고히 정리된 나만의 개념 위에도 새로운 레이어를 얹을 수 있었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영감이 떠올랐다.

   발화된 생각과 관점을 시야를 옮겨가며 곱씹어볼 수 있다는 것, 타인의 사상에 감화되고 무의식적으로 동화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내 것으로 소화시킨 뒤 다시 발화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쉽게 발생하는 상호작용이 아니다. 설령 훌륭한 사람들이 모여 있더라도 이는 몇 가지 결여된 작은 이유로 쉽게 깨어진다. 그 때문에 연구실에 합류하고 고작 몇 주쯤 흘렀을 때, 나는 쉽게 다시 찾아오지 못할 순간을 맞이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미디어아트를 공부했던 학부 시절에도 여러 분야를 학습하며 다양한 방향성을 가진 이들과 함께했으나 상호작용의 정도가 다름을 느꼈다.

   최근 몇 년간 ‘융합’이라는 키워드가 각광받고 있다. 국가가 융합형 인재를 길러내고자 그야말로 사활을 걸고 있다. 이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각 분야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인물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근거한다. 그러나 나는 이른바 융합형 교육과정을 겪으며 이러한 접근의 여러 결과물을 목격해왔고, 쉽게 긍정적 입장을 갖지는 못한다. 융합형 교육과정을 통해 무수한 정보를 제공하고 다양한 분야를 경험케 하는 것은 여러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강점을 갖게끔 한다. 그러나 고등학교까지의 정규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고유한 분야가 생기지 않은 이들에게 이러한 접근은 어떠한 전문성도 형성케 하지 못하고 다방면에서 결여된 결과를 낳는다. 학부 재학 당시 뚜렷한 성과를 낸 이들은 일찍이 자신의 방향성을 결정하거나 고등학교 시절, 혹은 대외활동을 통해 입학 전부터 자신의 분야를 길러온 사람들이었다. 각자의 분야에 정통한 대학원에서도 이러한 강제적 충돌은 어느 한쪽의 기준도 만족시키지 못한 채 끝나고 만다. 서로에 대한 충분한 존중과 분야에 대한 영감이 부족한 상황에서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므로 동상이몽의 벼랑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다.

   현상학자 메를로퐁티에게 얽힘(Chiasm)이란 살(La Chair)이 내부에 가지고 있는 보편적 원리이다. 살은 몸과 세계라는 두 세계를 연결하는 존재론적 토대이자 터전이다. 동시에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며 몸과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이기도 하다. 얽힘은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며, 얽힘은 관계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얽히기 위한 존재론적 장과 다르지 않다. 모든 원자는 서로 얽힘으로써 무거운 원자를 만들어내고, 이들의 얽힘은 나아가 생명체를 비롯한 우주의 모든 천체를 직조해내면서도 ‘틈’을 유지하여 서로를 하나로 묶어버리지 않고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의미를 드러낸다. 양자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라는 현상이 있다. 얽혀 있는 두 입자는 한쪽의 상태가 변화하면 다른 한쪽 역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즉시 변한다. 이처럼 우주는 얽힘을 통해 새로운 살을 만들어내는 존재론적 토대, 즉 우주는 살이다.

   입자는 단독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지만 이들의 얽힘은 우주를 만든다. 그러나 이 역시 입자들이 단독적으로 얽힌 것은 아니다. 빅뱅 직후 우주가 팽창할 때 우주배경복사의 밀도는 완전히 균일하지 않고 미세한 요동을 만들었다. 이러한 밀도의 차이로 인해 암흑 물질이 그물과도 같은 우주의 골격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일반 물질은 그 토대 위에 자리 잡았다. 일반 물질의 밀도 상승으로 인한 얽힘은 은하와 같은 천체를 만들었고, 그 안에서의 밀도 상승은 우리와 같은 생명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복잡계에서 하위 단계에서 예측할 수 없는 현상이 상위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을 창발(Emergence)라고 부른다. 결국 우주 전반에 걸친 얽힘은 관계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살로부터 새로운 살을 만들어내는 창발인 것이다.

   우주는 키아즘에 의해 얽히고 새로운 창발적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현상학적, 존재론적 장, 즉 살이다. 여기서 창발은 환원될 수 없다. 예측하거나 의도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학원생 간의 관계로부터 떠오른 영감도 그렇다. 이러한 영감은 수소 원자나 단백질 분자로부터 예측될 수 없으며 대학원생의 삶으로부터 유추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얽힘은 관계 속에서 창발적으로 작동하고, 영감을 꽃피운다. 영감은 단순히 새로운 단계의 얽힘이 아니다. 우주적 얽힘과 창발 끝에 발생한 결과물이다. 메를로퐁티가 언급했듯 살의 얽힘으로 인해 주체가 객체가 되고 객체가 주체가 되는 교차와 관계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사물들 속에, 그리고 타인 안에 위치할 때 마침내 보이는 것들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영감은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것 중 가장 깊은 두께이다.

   융합이란 결국 환원되거나 의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얽힘으로써 창발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얽힘과 창발로 말미암아 융합은 영감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난다. 2022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일컫는 융합이란 협업에 불과하다. 단순히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모아놓으면 그것은 혼돈에 그치고 만다. 그 내부에서 복잡한 요소들이 얽히면서 발생하는 밀도 상승과 충돌이 현상학적 장 내에서 형성된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새롭게 떠올라야 한다. 

   이러한 융합은 심지어 함께 얽히는 그 순간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학부 시절 여러 분야 사이에서 혼란을 겪었던 학생과 대학원의 동상이몽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은 그대로 실패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씨앗으로 가라앉아 있다가 먼 미래의 어느 순간 영감의 형태로 창발적으로 떠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얽히는 존재,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얽힘과 창발을 기대하며 나아간다. 그 끝에 떠오를 영감과 현상학적 두께를 기다린다. 모든 관계가 얽히다 못해 식어버리고 우주가 열죽음을 맞이하면 영감은 영원히 끝나는가? 아니다. 모든 것이 완결되어 더 이상의 변화가 없을 것 같은 평형 상태에서도 작은 자극만 있다면 변화는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김성백 대학원생, 미디어아티스트

<저작권자 © 동국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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